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파비 제국 (문단 편집) == 종교 == '''[[사파비 제국]]이 [[이란]]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야.''' 사파비 제국이 들어서기 이전까지만 해도 페르시아 지방에는 [[수니파]]가 강세였지만 사파비 제국 이후 페르시아는 [[시아파]] 국가로 변모했다. 현대 [[이란]]과 [[아제르바이잔]] 시아파 국가가 되고 이라크 인구 상당수가 시아파인 이유 역시 바로 이 사파비 제국 때문이다. 또한 시아파 내부에서도 수많은 종파들 가운데 [[12이맘파]]가 [[자이드파]], [[이스마일파]] 등 다른 종파들을 제치고 주류를 이루게 된 것도 사파비 제국의 국교가 12이맘파였던 덕이 크다.[* 사파비 제국의 국교가 처음부터 12 이맘파였던 것은 아니었다. 사파비 제국은 사파비야라는 시아파 수피 교단에서 출발했으나, [[이스마일 1세]]나 [[타흐마스프 1세]]는 자신을 구세주로 여기고 숭배한 사파비야 열성 신도들을 숙청/토사구팽하고 대신 아랍인 율법학자들을 초빙하여 12 이맘파를 국교로 삼았다.] 사실 사파비 제국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페르시아 지방은 오히려 확고한 수니파 국가였다. 심지어 [[오스만 제국]]이 자국 내에 적당한 수니파 율법학자들이 부족하자 저 먼 페르시아까지 학자들을 보내 수니파 교리들을 배워오게 할 정도였다. 대표적인 수니파 국가였던 [[아바스 왕조]] 시대까지만 해도 페르시아인들이 고위직들을 한 자리씩 꿰차고 앉아있었고 페르시아는 수니파 교리의 중심지라 할만한 지방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풍조는 엄격한 [[시아파]] 교리를 추구하던 [[사파비야]]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뒤집힌다. 사파비 제국의 초대 황제 [[이스마일 1세]]는 [[파티마 왕조]] 이래 가장 불관용적인 군주라고 불릴 정도로 [[수니파]]에 억압적이었다. 그는 [[정통 칼리파 시대]]에서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제외한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을 대놓고 저주했고 오직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만이 유일하고 정통성 있는 [[무함마드]]의 후계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파비 제국은 수니파에 대한 탄압이 지나칠정도로 심했고 매우 악랄했다. 페르시아를 통일하며 사파비를 건국한 이스마일 1세부터 수니파를 악랄하게 탄압했는데 그는 기존 [[수니파]] 울라마[* Ullama. 이슬람 율법학자를 의미한다]들에게 오직 3개의 선택지를 제시했다. 죽거나 추방당하거나 개종하거나. 상당수는 개종하는 걸 선택했지만 끝까지 신념을 고수하다 죽은 이들도 많았다. 기존 수니파 교단들은 재산들을 모조리 몰수당했고 반대로 해외에 있던 시아파 교단들은 이스마일 1세의 초청을 받아 하나둘씩 페르시아 내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만 이스마일 1세가 이렇게 가혹할 정도로 시아파를 밀어붙인 데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당시 사파비의 최대 경쟁국은 바로 서쪽의 [[오스만 제국]]이었는데, 이 오스만 제국이 전 수니파들의 [[칼리파|보편 칼리파]]를 자처했기 때문이다. 이스마일 1세로서는 이 오스만 제국을 따라 내부에서 분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수니파들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고, 종교적으로 사회를 안정시키고 내부의 잠재적인 적을 없애기 위해 강제로 전 국가의 시아파화를 실시했던 것이다. > 예로부터 이슬람 사회는 다원주의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파비 왕조는 공식 종교를 유지하기 위해 공식 종교와 경쟁을 벌이는 모든 형태의 이슬람을 제거하는 엄청난 계획에 착수했다. 다른 이슬람 지역에서는 거의 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박해의 물결 속에서 십이 이맘파의 신앙만이 강요되었다. ... 또 메카 순례 대신 시아파 이맘의 성묘에 대한 참배를 장려했다. >---- > 이슬람의 세계사 / 아이라 라피두스 저 이스마일 1세는 수니파 [[모스크]]들을 싸그리 허물어버렸다. 또한 시아파를 국교로 지정한 것은 당연하고 '사드르'라 부르는 관직을 도입해 국가적인 규모로 개종 사업을 책임지게 했다. 정통 칼리파였던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을 참칭자로 보고 저주하는 내용의 제례를 반드시 기도 시간마다 암송하게 시켰고, 우마르가 암살당한 것을 축하하는 축제까지 정기적으로 개최했다. 심지어 수니파 신도들의 무덤들을 모조리 파헤치기까지 했다. 이는 국외에서도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고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2세]]가 1501년에 공개적으로 이에 우려를 표시할 정도였다.[* 물론 이스마일 1세는 무시했다.] 이런 정책에 따르지 않는 완고한 수니파 신자나 법학자들은 모두 처형했다. 이스마일 1세의 시아파 개종 시도는 이란 지방에 그치지 않아서 [[이라크]]의 [[바그다드]]나 [[아제르바이잔]]에서도 착실하게 시아파 화를 진행했다. 그 뒤를 이은 [[아바스 1세]] 역시 개인적으로 수니파를 혐오했고 끊임없이 수니파들을 탄압했다. 후일 사파비 제국을 무너뜨린 [[나디르 샤]]가 다시 국교를 수니파로 재개종하려 시도했지만 너무 빨리 죽어버린 탓에 실패했다. 그러나 사파비의 수니파 탄압은 당시의 기준으로 봐도 도가 지나쳤고 수니파의 증오를 받게 되어 수니파들이 틈만 나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는 나중에 제국이 붕괴하는 데 큰 원인을 제공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발흥한 [[호타키 왕조]]가 사파비 제국을 침공하자, 제국 내 숨어있는 수니파들과 조로아스터교도들이 이들을 대대적으로 지원하였고, 덕분에 호타키 왕조는 사파비 제국 군대를 상대로 한동안 연전연승을 거듭할 수 있었다. 호타키 왕조의 연승 행진은 수니파였던 나디르 샤가 등장하고나서야 비로소 끝을 맺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